개념
올해의 춘부가 갑자기 죽었다. 백세 넘는 장수 투성이의 가계로, 본인도 가족도 그렇게 된다고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도 지키기 시작했고, 세 마리의 작은 거북이도 남겨졌다. 아버지는 옛날부터 생물을 사랑했고, 애완 동물 가게에서 구입하거나 산과 거리에서 잡아서 다양한 작은 동물과 벌레를 잠...
올해의 춘부가 갑자기 죽었다. 백세 넘는 장수 투성이의 가계로, 본인도 가족도 그렇게 된다고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도 지키기 시작했고, 세 마리의 작은 거북이도 남겨졌다. 아버지는 옛날부터 생물을 사랑했고, 애완 동물 가게에서 구입하거나 산과 거리에서 잡아서 다양한 작은 동물과 벌레를 잠시 기르고 있었다. 요즘은 다가메에게 금붕어를 하고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계속 고양이를 자르지 않는 삶을 살았고, 아버지가 뭔가를 데리고 돌아가자, 시끄러운 얼굴을 하면서 항상 용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바다나 강에서도 다양한 물고기를 잡았다. 아름답게 빛나는 대량의 물고기를 어머니와 둘이서 먹고 요리하고 배가 빵빵이 될 때까지 먹여주었다. 식물에 관해서도 아버지는 원예, 어머니는 꽃꽂이를 맡았다. 또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일상적으로 녹아있는 집에서, 아버지는 낚시 장치와 쓰가루 채우기 장대를 자작하고, DIY도 손쉽게 해냈다. 어머니는 양재학교를 나와서 발판 미싱을 능숙하게 조종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저도 어렸을 때부터 동식물을 사랑하고 손을 움직여 뭔가를 만들어 놀고 있었다. 스피츠의 쿠사노 마사무네의 초현실적이고 감미로운 가사의 세계관, 얀 슈뱅크 마이엘의 감각에 직접 박히는 아이러니한 스톱 모션,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만들어내는 기천열한 캐릭터와 쫄깃한 종교적 암유 따위에 열중 있던 고등학교 시절에 『사진 룬입니다』가 유행해, 나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최초의 마음에 드는 모티프는 자주 있는 고무의 오리로, 많은 동급생에게 갖게 하거나, 여러가지 장소에 두거나 해 촬영했다. 사진을 포켓앨범에 넣어 다니며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음란에 잠겼다. 그 무렵부터 자작의 사진을 컬렉션하기 시작했다. 대학 시대에 3개월만 사귀던 연상의 연인은 사진가로 그의 사진을 보고 있는 가운데 어렸을 때 동식물을 질리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할아버지로부터 양도한 SLR에 아르바이트대에서 샀던 매크로 렌즈를 붙여 동식물의 업을 찍는 기쁨을 알았다. 소위 보통의 매크로 사진은 물론, 달팽이 장난감에 진짜 아기 달팽이를 싣거나 목걸이 구슬을 장미하여 라이트 박스에 깨끗이 늘어놓거나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 사진에 남기는 것에 열중 되었다. 서클의 그룹전에서는, 자신의 컬렉션을 흐리게 하는 것처럼, 과잉의 수의 사진을 늘어놓았다. 사진의 교실에 다녔을 때, 방의 사진을 찍는 과제로, 물건의 태어나 역사에 생각을 느끼게 하면서, 차분히 찍는 즐거움을 알았다. 또 오모테산도의 거리에서 벌레의 그림을 팔고 있던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어, 타마무시의 표본을 입에 물리거나, 속박이 되어 받은 사진을 찍었다. 혼자 해외에 갈 수 있게 되면, 사진을 찍는 것으로, 자신이 본 것을 컬렉션에 할 수 있는 것이 기뻤고, 열심히 셔터를 끊었다. 선물로 인형과 잡화도 사들였다. 카메라맨이 될 수 있다고 꿈꾸던 시기도 있어, 인물 촬영을 배우고 싶어 스튜디오에 들어갔지만, 빈 시간에 찍은 것은, 물고기나 모츠를 장난감과 얽히거나, 다양한 버섯 위에 시라코를 올려 케이크 에 기대거나 한 것이었다. 모델을 부탁한 선배에게는 입에서 조개의 끓이를 뱉어내고 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전혀 일에 이르는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2007년의 한가지전의 그랑프리 개인전에서는, 촬영의 사진 1000장을 전시했다. 그 이후에는 해외에서의 전시가 늘어나 피사체와 현지에서 장난감과 민예품을 사는 양이 늘어났다. 기념품을 가져오기 위해 특대의 트렁크로 가서, 각국의 벼룩시에서 인형을 아무것도 맞이하거나, 트렁크에 들어가지 않을 때는, 프랑스로부터 20 kg의 책을 보내거나, 독일로부터 상자 가득 봉제인형을 규규 포장 로 보내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아시아 잡화상과 재활용 숍, 야후옥과 메르카리 등 물건이 늘면 작품의 세계도 풍부해질 것임에 틀림없다고 낚시했다. 개인전이 끝나자 다음 제작을 위해 다시 물건을 사서 반복했다. 촬영의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내 사진이나 물건의 컬렉션도 늘어나갔다. 캐릭터는 처음 선반에 장식하고 있었지만, 그 안 넘치고 골판지에 들어가 결국 반투명 의상 케이스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결혼하고 나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것부터, 이전에는 망설이고 사지 않았던 것을 어른 사게 되어 갔다. 첫 아이는 사산이었지만, 자신의 팔에 점적의 바늘이 찔린 채, 중판 카메라로 제대로 사진에 담아, 내 컬렉션이 되었다. 그 후 아이가 2명 태어나 그들의 사진도 계속 찍고 있다. 2년 전의 한여름, 집의 이웃의 낡은 아파트에 작은 아틀리에를 짓고 있었다. 잠시만에 현관을 열자, 지금까지 냄새가 없는 강렬한 냄새가 쏟아져 있었다. 바닥에 갈색 액체를 흘려 흘리고 있는 냉장고를 열면 암모니아에 눈이 태울까 생각했다. 냉장고가 부서져 냉동실에서 딸랑이가 되어 있던 10종류 30마리 정도의 동물이 도로도로에 녹아 있었다. 죽었다고는 해도, 계속 냉장고에 방치한 자신을 회개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현재, 평상시 사용하는 냉장고의 냉동 스페이스의 60%가, 1.5kg의 돼지, 꼭대기의 아름다운 뱀 2마리, 오카자키 오우반이라는 닭, 데구 2마리, 햄스터 10 마리 등의 촬영을 기다리는 동물들에게 계속 점령되고 있다. 저는 평소 삶에 빠져 있어 제작을 시작하는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모티브를 소중히 생각하면 생각할 정도로 정중하게 찍지 않으면 허리가 무거워지고 몸도 머리도 경직해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동물들을 언제까지 잠들게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구즈구즈의 나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아이들이 제작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계기는 3년 전의 대만에서의 체재 제작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아이들을 이루기 위해 피사체가 되었으면, 건강하게 노력해 무엇이든 해 주었다. 최근에는 그들도 소재 모임을 담당하고, 벌레나 식물, 죽은 참새 등을 찾아 헌상해 주거나, 대량의 소품이 들어 있는 서랍을 한쪽 끝에서 찾아, 여우의 얼굴의 모피와 찍고 싶다고 말하기 하는 시말. 동물과 함께 찍는데 메이크업을 해 달라고 했더니 스스로 해 버렸다. 대략의 것을 허용해 주기 때문에, 맹독의 협죽 복숭아를 갖게 하거나(고무 장갑을 사용 신중하게), 얼굴에 햄스터나 고구마를 태우거나. 아이들에게 있어서도, 동식물과 만들기가 있는 환경이 당연하고, 그들도 나와 닮은, 만명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기르는 방법을 할까라고 생각하면, 기의 독이지만 재미있다. 나의 아틀리에는 분반 세기에 걸쳐 만든 경이로운 방 (루비 : 벤더 커머)이다. 500권의 책, 1000종류의 천. 의상 케이스 20개분의 뼈·화석·광물·나무 열매 등의 자연물, 민예품·장난감·봉제인형·미니어처 사람 등의 캐릭터. 10마리의 박제, 정원의 식물과 벌레들, 길들여지고 있는 작은 생물들, 자신의 아이들도… 그들이 내 벤더 커머를 만들고 촬영의 차례를 기다리고있다. (이 기간 동안 선반에 무거운 짐을 내릴 때 다리 꼭대기에서 균형을 잃고 좁은 방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있는 금 닭 박제 유리 케이스에 머리를 쳤다. 목에 유리가 박혀 죽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찍을 수 없는 대량의 모티프를 남겨, 떠오르지 않고 유령이 되어 버린다… 가게에서 대여하거나 많은 생물을 기르시는 분들에게 부탁해 촬영시켜 주거나, 벤더카머가 아틀리에 밖으로 확장하기 시작하고 있다. 오랫동안 사진을 계속 찍었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미 스스로 찍은 사진을 모두 기억하기가 어려워져 왔다. 스스로 만들어낸 작품의 컬렉션에 매일 헤매고 방황하고 익사하고있다. 아이가 태어나서 나는 계속 일상생활에 농락되어 최근에는 아버지가 남긴 동식물도 늘어난 적도 있고, 카파오버에서 매일 잽잽 무언가를 흘리며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제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말려들어 다리를 긁으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벤더카머 컬렉션을 계속 늘려가고 싶다. 그 성과물로서의 사진이, 누군가의 벤더카머에 더해 주실 수 있다면, 이런 행복한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