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에서는, 먹의 농담 등으로 문자에 입체감을 내지만, 문자를 입체물로서 화면상에 존재시키려고 시도했다. 「원시」의 문자를 상형 문자나 다양한 서체로 겹쳐 쓰고 있다. 언뜻 보면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서예에서 붓의 상하 운동이나 완급 등의 「문자를 쓴다」라고 하는 동작에 의해 생긴 요철은, 「그리기」라고 하는 동작에 의해 생긴 요철과는 다른 것이 되는 것은 없을까 생각한다. 즐거운 '생'을 쓸 때는 붓도 가볍게 춤추도록 움직이고 괴로운 '생'을 쓸 때는 먹어먹는 선이 된다. 인생은 즐거운 일만이 아니다. 괴로운 것, 괴로운 것도 있는 그대로 「생」의 문자로 써 겹쳐 가, 「살다」를 표현하고 있다. 서예는 "읽을 수 없다"는 것에 의해 감상자가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거기서 문자를 거듭해 쓰는 것으로, 굳이 읽을 수 없게 하고, 「문자를 읽는다」라고 하는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감상자 자신이 자유롭게 작품과 마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살아있는"시리즈는 할아버지와의 이별이 계기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할아버지와 보낸 날들을 모두 잊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캔버스에 '생'이라고 계속 썼다. 쓰는 것이 자신에게 있어 살 희망이라고 강하게 느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지만, 자신과 같이 괴로운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작품을 만들어 가고 싶다. '살다'란 무엇인가, 또 자신의 '생'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